서남 벤깟 철삼각 터널은 빈증성 벤깟 현의 서남부 지역의 안디엔, 안떠이, 푸안 3개의 마을에 위치하며 투 저우 목 시도시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2차의 침략적 저항의 위치와 규모로 3개의 벤깟 서남부의 터널은 1996년 3월 18일에 문화정보부에 의해 국가급 역사적-문화적 유적지로 지정되었으며 총 면적은 23만m2이다.
동쪽으로는 미 프억, 터이 호아, 떤딘; 서쪽으로는 사이공 강; 남쪽으로는 떤안(투 저우 못), 북쪽으로는 안랍, 롱 응우옌(벤깟)과 접하며 이곳은 "철삼각주" 지역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철삼각주"라는 이름은 이전의 미국 제국 침략 저항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해졌다. 하지만 이곳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사람도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철삼각주" 이름을 매우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철삼각주를 벤깟 서남부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벤깟 서남부 – 저우 띠엥- 롱 응우옌 지역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더 넓게는 롱 응우옌 (벤깟) - 짱 방 (떠이 닝) 그리고 꾸찌 (호치민 시)까지 이어지는 것으로도 주장한다. "철삼각주"라는 지명은 전쟁의 발전에 따라 함께 발전해서 모든 의견은 다 맞다. 단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철삼각주"의 원래 유래가 안 디엔, 안 떠이, 푸안 (빈증성 벤깟현의 서남 3 개 마을)의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전 프랑스 식민지 저항의 시기에 벤깟 서남 3개의 마을은 안탄 전쟁지역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안탄은 동부전쟁지역, 남부위원회, 사이공-자딩 특별위원회 등의 총본산이었기 때문에 지방 주민들은 곧 혁명을 깨달았고 베트남 국민의 희생과 고난이 많은 저항 전쟁 동안 가장 격렬한 도전에 직면했다.
특별하고 흥미로운 것은 1948년에 이 땅에서 최초의 터널 시스템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 후 1960년에 꾸찌 게릴라들은 이 지방에서 경험을 배우고 터널 시스템을 구축했다.
항미 전쟁 기간 동안 미군은 여러 번 토벌했지만 그들은 이곳의 민심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1967년에 미국 원정군이 남부에서 직접 전쟁을 벌일 때까지 온갖 강력한 군대와 최첨단 살상무기와 함께 강하게 몰려들었다. 1967년 1월 2일부터 21일까지 체 다 분(Ce - da - phôn) 토벌을 열었으며, 규모는 30,000명의 군, 400대의 전차, 80척의 군함, 100개의 대포, 그리고 여러 종류의 폭격기 또는B.52폭격기가 이 중요한 목표를 파괴했다. 하지만 구부러지고 얽혀있는 터널에 의한 우리 군은 숨어있어 비밀리에 격렬한 저항을 열었다. 결국 미군은 물러서야 했다. 3,200명의 미군이 소탕되었고 149대의 전차와 장갑차가 파괴되었고 28대의 폭격기가 격추되었고 2척의 군함이 격침되고 화염에 휩싸여서 심한 참패를 당했다. 이 전쟁에서 단지 10발의 총알이 9명의 침략자를 파괴한 저격 영웅 응우옌 반 트엉이나 부상병을 돌보고 보호하기 위해 폭탄으로 몸을 굴린 무장 영웅 보 티 후잉이 등장했다.
연이은 참패 후, 적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이 지역으로 "철삼각주" (서남벤깟 터널)라는 이름을 지었다.
서남터널은 단순히 지명을 의미하는 곳이 아니라 혁명과 저항의 상징이다. 괭이날과 대나무 굴착기로 된 원시적인 무기로, 서남부 3개의 마을의 군과 주민들은 수백 개의 터널을 지하에 가로 지르며 신기한 "지하 마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었다. 이것은 독특한 건축물로, 터널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수만 세제곱미터의 땅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만은 매우 고된 일이며 공들여 군민들의 협력의 표현이다. 고지대 가정들은 모든 집이 터널과 참호를 파서 터널로 연결시키고 생산하면서 마을을 지키기 위한 연속적인 자세를 취한다.
척추선은 지상에서 4미터 떨어져 있는 터널의 주요 길이다. 이 터널에는 높이 1.2m, 너비 0.8m가 있다. 2, 3층으로 구성된 땅굴이 있고, 오르내리는 곳에는 비밀 문이 있다. 터널을 따라 외부 환기구가 있는 꼭짓점이 있는 터널에는 땅굴이 위장되어 있다. 위아래로 비밀 지하문 주변에는 많은 작살이 있는 함정, 못갱내, 지뢰가 배치되어 있으며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폭격기와 헬리콥터 저항 유탄 발사대가 있다.
터널에 연결하는 것은 전투 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넓은 참호, 무기, 식량, 식수를 비축하는 곳, 우물, 조리용 참호, 작업용 및 지휘관 참호, 부상병 양성 참호 등이 있다.
늑골선(보조 지류)은 주요 길에서 각 마을로 파낸다. 땅굴인 전투용 부류로 이어진다. 각 부류는 3개의 땅굴로 1km 길이이다. 전투 땅굴 주변에는 함정들이 배치돼 있고 지뢰는 잘 위장돼 있다.
거의 100km 길이의 터널 시스템으로 약 50대의 전투용 땅굴과 부상병 구호, 무기, 식량, 식량 비축 등을 위한 많은 터널이 있다. 서남부는 많은 저항 기관들과 단체들의 근거지이며 또한 적들을 즉석에서 소멸하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이 근거지에서 많은 주력 무장 세력이 큰 전투와 큰 작전을 하는동안 적의 소굴을 공격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었다. 레홍퐁 작전(1950년)과 14호 도로에서의 교통 요격, 봉화, 앗땅버러, 세다분 등의 전투였다.
서남 3개의 마을의 건설과 터널 강화는 정치, 군사, 경제 측면에서 전반적으로 너그럽게 진행되었다. 당, 정부, 전선 단체들은 이 곳 사람들의 삶을 모든 면에서 지원했다. 덕분에 군민 관계는 항상 하나의 통일된 것으로 일치됐다.
그 활동으로 서남 3개의 마을의 터널은 특히 항미 구국의 시기에 두 번의 항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년 동안 미국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서남 3개의 마을의 터널이 효과를 발휘했다. 서남 3개의 마을의 주민은 수백 대의 폭격기와 장갑차 등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수천 명의 적들을 매몰시키기 위해 싸웠다. 특히 무신년(1968년) 작전과 1975년 봄 작전에서 서남터널은 대규모 군대가 집결하여 사이공으로 진격하여 1975년 전국민의 승리 저항 활동에 기여했다.